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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권 배움숲 7강 참여자 후기] 공유
  • 작성자 관리자
  • 작성일2023.04.28
  • 조회수 207

3월10일부터 4월28일까지 매주 금요일 진행되는 성인권 배움숲 모두를 위한 젠더학, 그중 7강 '여성징병제가 성평등의 지름길인가?'에 대한 후기를 다음과 같이 전0환님이 작성해 주셔서 공유합니다.

 

 

1.

새롭고, 배우는 시간이었으나, 위축된 느낌이었습니다. 시니피앙으로서의 남자가 호명되나, 어쩔 수 없는 시나피에의 남성으로 들려지기에 ‘오지 않을 자리에 와 있는 것은 아닌가?’ 불편한 감정이었습니다. 이 위축된 불편한 감정이 제가 얻은 가장 큰 배움이기도 합니다. 이 감정은 저를 낯선 자문(自問)으로 이끌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삶이 이런 모습이지 않을까? 왜 그렇게 여성들이 ‘평등을 투쟁해야 하는 모순’을 자기 삶의 무게 위에 얹어 놓으려하는지!?” 공감이라는 멋진 표현을 쓰고 싶으나, 머리로 알아채는 수준이라는 솔직한 자문입니다.

 

40대 후반에 세 아들에게 내어 준 아내와 사는 남성입니다. 직업은 목사입니다(목사를 법적으로는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신학과 한국(근현대)역사를 ‘공부했었고’를 ‘하고 있다’로 붙들려 골방에 있는 것을 좋아하나, 가끔 너무 외로워 누군가에게 전화하려다 방해하는 것 같아 포기하는 소심한 사람입니다. 제 소개를 하는 이유는 이 글의 한계를 되도록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남성이고, 가부장제에 체화되었고, 재생산하며 살고 있는(제 의지와 상관없을 때가 많으니, 너무 뭐라 하지는 말아주기를) 남성의 글입니다. 페미니스트이기 보다는 지지자 혹은 조력자에 위치한다는 표현이 적확합니다. 같이-깊게 연대하려나, 자연이 허락하지 못해 공감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밝힙니다.

 

페미니즘은 통일되고 응집할 만한 명확한 주제가 ‘없’습니다. ‘없다’고 표현한 이유는 페미니즘이 다루는 분야는 삶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주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음을 이번 강의들의 반증합니다. 삶 모든 분야를 바라본다는 장점은 동시에 단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곱 명의 선생들에게 주제를 단순화시키는 순간 페미니즘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강박증을 느낀 것은 저의 착각만은 아닐 듯합니다. 복잡-다층의 사회, 얽히고설킨 삶을 일반-유형화해야 하는 학문의 한계도 있겠지만, 한 여성들의 삶에 ‘악령’처럼 붙들어 있는 부조리를 밝히는 삶으로서의 학문이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하는 ‘뇌피셜’을 펴 봅니다.

 

2.

여성 징병제는 정말 성평등의 지름길인가? 징병제 자체를 반대하는 저는 ‘왜 징병제를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일까?’라는 의문을 업고 강의를 들었습니다. “구조적 시스템이 우리 사회 안에서 이미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들이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딱지와 편견을 부과하고 있다(조지아 지프, 『환대와 구원』,2021,87.).” 며칠 후 읽은 이 책이 그 시간에 제가 놓친 부분을 알려 주었습니다. 여성 징병제 청원에 담긴 ‘국민’, ‘성평등’, ‘체력’ 레퍼토리는 긍정이든, 부정이든 여성의 능력을 활용해야 한다는 담론입니다. 여성의 능력이 사용되어 여성들이 얻는 사회 지위는 국민입니다. 구조가 만든 딱지와 편견을 탈주하기 위해 구조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논리구조를 편집해야 하는 현실적이며 실존적인 문제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헌법은 대한민국에 태어나는 순간 모두가 국민이라고 밝히는데, 국가는 국민이 돼라 합니다. 개인에게는 삶의 물질적인 질과 직결되는 국민 만들기에 ‘존재’를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사회입니다. 이 사회에서 늘 이등국민은 여성들은 징병제 자체를 물을 수 없습니다. 여성 징병제가 성평등의 길이 될 수 있는가를 묻는 것도 큰 투쟁입니다.

 

유령처럼 정체를 알 수 없으나, 우리 삶을 통제하는 국민 만들기는 또 다른 악령과 조우합니다. 진리는 없고 일리가 타탕하다는 포스트모던 사상은 애석하게도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 사회에 기반을 둡니다. 주체를 해체하고 타자 자체가 주체가 되는 포스트모던보다 우리 삶을 더욱 지배하는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 담론입니다. 이 담론은 징병제에 미지근했던 관계들을 대립하게 만듭니다. 남성들은 국가에는 던지지 못한 돌들을, 같이 함께 살아야 하나 늘 이등 국민으로 규정당한 여성들에게 던집니다. 김엘리 선생이 설명한 23년 기준, 20-30대의 군대 이해는 40대인 저의 군대 이해와 결이 완전히 다릅니다. 40대(최소한 저에게는)는 불합리하지만 신성한 의무로 여겼는데, 20대는 착취로 바라보는 시선이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느낌은 다르나 공유점이 있습니다. 여전히 남자들은 불만 가득하나 국가에게 군대를 말하는 것을 공포로 여깁니다.

 

군대는 한국에서 어떤 사회적 위치일까를 물어봅니다. 한국 사회가 가부장제인 위계를 지탱하고 재교육-생산하는 구조가 군대입니다. 개인적은 경험으로 군대는 밀실, 무법, 불법이 사회를 움직이게 하는 방식임을 체화하게 하는 조직입니다. 부정의가 정의가 될 수 있는 유일한-신적인 질서는 ‘계급’입니다. 군 생활에 이를 너무나도 경험한 저는 징병제를 반대합니다(주특기 2811로, 육군 병장 만기 제대를 했습니다). 군대는 ‘필요악’이기에 모병제를 차선으로 주장합니다.

 

‘필요악’이라기보다는 악적인 요소가 강한 군대에 여성을 반드시 보내야 한다고 왜 주장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근대 국가 형성과 민주주의 근간에 ‘군대’가 있습니다. 근대 국가들의 어두운 근간이 군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를 꼭 가야 하냐고 따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제에 대항하며 성립된 근대 국가 그리고 반공을 등에 업고 국가다워진 나라가 대한민국입니다. 군대를 부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신성 모독이 되며, 신성 모독은 재판도 없이 화형을 집행하는 마녀 사냥이 한국 사회에서 재현된다.

 

(여성)징병제는 사회적 지위를 잃어간다는 피해 의식의 남성들이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언로로만 볼 수 없고, 군대를 가서라도 남성처럼 국민 되려는 여성들의 인권 확장 운동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징병제 반대는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그 누구도 물을 수 없고, 묻는 순간 신성 모독이 되는 국가 만들기에 포섭된 대한민국인의 역린입니다. 남성들의 강력한 질문에 페미니즘이 국민만들기 안에서 주장을 할 수 밖에 없는 보기 힘든 근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징병제 자체를 반대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정말 ‘마녀사냥’ 당합니다. 결국 시민들이 국가와 싸워야 하는 군대 문제는 시민과 시민의 싸움이 되었고, 마초들에게 신자유주의와 능력주의는 든든한 담론지원을 합니다.

 

김엘리 선생은 조심스럽게 강의 후반부에 징병제에 ‘?’를 찍어보는 논의를 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국민을 꼭 군대 가야 하는 것만으로 물어야 하나요?”라는 김엘리 선생의 질문 같은 이 대답이 이 강의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럽을 중심으로 여성 국방장관을 소개합니다. 여성이 들어갈 수 없는 남성의 영역 그것도 수장이 될 수 있다는 모습은 세계가 여성의 인권 신장되고 있다는 충분한 증거이지만, 김엘리 선생은 이런 징후를 깊게 읽어 보자는 주장을 합니다. 과연 여성 국방장관이 페미니즘 운동에 긍정적인 신호탄인가라도 되묻습니다.

 

김엘리 선생은 강하게 “no!”라고 말하지 않았으나, 저에게는 강한 부정으로 들립니다. 여성군인들의 증가 혹은 여성들의 군사 분야 참여 독려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인정합니다. 그러면서 그 민주주의가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되묻습니다. 세계를 신냉전시대로 만들려는 미국-유럽의 숨겨진 획책이 있음을 주장합니다. “이슬람국가들의 비민주성, 야만성, 성불평등성, 반인권(퀴어)을 드러내는 담론으로(유인물, 15쪽)” 여성 군인들이 부각된다고 말합니다. 민주주의가 반민주주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는 근간이 군대이고, 이 군대에 여성의 많은 기용은 여성신장인 동시에 민주주의 수호라는 논리입니다. 이 지점에서 과연 민주주의 국가가 반민주주의 국가의 침략에 방어했는가? 라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민주주의가 먼저 침략하지 않았는가? 또 다른 질문은 민주주의는 폭력을 인정하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이 질문에 김엘리 선생은 “자신을 위장하기 위해 급진적 다양성과 젠더의 유연성을 이용, 여성과 유색인종은 미끼가 된다. 여성의 권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성평등과 인종 정의를 파괴하는 제국적 민주주의(유인물,15쪽)”를 간략하게 소개합니다. 저에게는 눈에 보이는 구조악보다 더 악하나 선한 형태의 구조악을 보자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3.

요즘 20대들은 페미니즘은 586을 주적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586에 대해서는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보다는 아니지만 분명 공을 다 까먹을 정도로 과가 차고 넘칩니다. 문제는 페미니즘이 왜 주적이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중심에 여성징병제가 서 있습니다. 작금의 사회에서 젠더 갈등은 사회 위기로까지 나아 갈 수 있다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봅니다. 인류가 진보하는 순간은 개혁이 아니라, 혁명입니다. 저는 이 법칙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습니다. 다만 혁명의 주체가 피에서 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페미니즘은 트러블 메이커입니다. 구조적 시스템 입장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입니다. 그 문제가 삶에서 일어나니 삶에 맨살이 드러난 가장 취약한 남과 여라는 사람들이 생채기를 입습니다. 같이 상처받으나 힘이 센 남성들은 여성들에게 알력을 행사합니다. 부정 할수 없는 애석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페미니즘은 당분간 계속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남자들의 공격은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남자들의 공격보다 더 큰 공격은 따로 있는 듯합니다. 국가(정부)와 자본의 직접적인 공격과 이간이라는 획책을 구사하는 간접적인 공격입니다. 피아식별이 불명확해져버리는 페미니즘은 작두 타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게도 칼 위에 춤이 한 사람일지라도 천도하도록 돕습니다.

 

평등을 위한 투쟁이라는 이 모순을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프레임에 갇힌 논쟁도 해야 하고, 프레임을 탈주하는 낯선 길도 투쟁해야 합니다. 이들에게 저는 지지자 혹은 조력자 정도의 경계인입니다. 혹자에게 비겁한 응원으로 읽혀도 굳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럼에도 희망의 핑계로 갈무리합니다. 조금 더 국가(가부장)와 자본에 탈한 인간다움을 누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세상의 문을 여는 페미니스트을 목이 쇠도록 응원한다고! 그렇게 투쟁하던 어느 날 주변인인 나 같은 소심한 사람도 확 돌아 최전방에서 춤을 출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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